하나열 바이블 스토리 신앙 목표 설정

우리 대부분은 신앙의 목표가 성경적이지 않다. 우리는 신앙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긍정적으로 나아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신앙 목표가 현실에서의 긍정적인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가장 긍정적인 삶을 성취한 사람은 솔로몬이다. 그는 우리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세상적 가치들을 소유했던 인물이다. 우리의 기준대로 한다면 그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만족한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인생 마지막 고백은 자신이 이루었던 모든 것을 허무한 것으로 돌린다. 자신의 인생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권면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그분을 경외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인생들의 근본이고 도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과 신앙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올바른 신앙 목표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와 번영신학을 배제해야 한다.


1.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


우리 신앙의 목표가 바르게 설정되기 위해서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어야 한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결국 현실에서의 긍정적인 삶의 변화를 신앙의 목표로 설정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성도의 실존이 어떠한지, 구원이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1) 성도의 실존 이해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3차원의 인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생각하고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에 집중하게 된다. 그 결과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현실에 대한 긍정적인 보상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실존을 현실에 묶어놓지 안는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보좌 앞의 24장로로 상징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백성들이다(4:4). 그들은 하나님 보좌 앞의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존재들이다(15:2-4).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 믿고 신앙생활 잘 하다가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3차원적 사고에 묶여 있다. 하지만 시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도의 실존은 이미 천국에서 승리의 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직 이 땅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이미 천상에서 승리의 면류관을 쓰고 있는 우리의 실존을 인식하고, 그 실존을 이루어가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목표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의 변화가 되어야 한다.


2) '이미''아직'(already not yet)


위에서 언급했듯이 우리의 구원은 이미 완성되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접목되어 지는 순간 우리의 구원은 취소되거나 포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구원을 우리의 조건이나 능력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셔서 하나님이 완성시키실 것이기 때문이다(8:30).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문제들 때문에 그 구원을 포기하시거나 취소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아니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 구원의 완성을 막지 못한다(8:35, 38-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땅에 삶의 터전을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완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 우리는 이미 신분적으로, 운명적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지만, 지금 현실의 삶 속에서는 여전히 자아만족적 삶을 추구하는 본성이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고 있다. 이것을 바울은 두 법이 자신 안에서 싸우고 있다고 고백했다(7:21-23). 하지만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기 때문에’(8:2) 감사와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광야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 광야를 통해서 자아만족적 삶을 버리고 하나님 절대의존적 존재로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백성으로 성숙해가는 것이다.


2. 번영의 신학 배제


성도의 실존을 이해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본성적으로 삶의 긍정적인 변화를 원한다. , 자아만족적 존재로서의 삶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편승해서 등장한 것이 번영신학이다. 열심있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높은 고지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복신앙과 고지론이 있다.


1) 기복신앙 배제


기복신앙은 신앙을 통해서 소위 하나님의 축복을 받자는 것이다. 신앙에 대한 보상으로 무병장수와 만사형통과 승승장구의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복신앙은 우리나라의 정서와 접목된 것이다. 정재현 연세대학교 종교철학과 교수는 국민일보와의 대담에서 한국인 종교적 심성은 무교와 유교가 80%를 차지하고 그 밖의 요인은 2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 점수를 높게 주어도 한국 기독교인의 종교적 심성은 20%만 기독교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다 가져도 20%밖에 안 되는 기독교적 심성을 가지고 100% 기독교인이라고 착각하는 데에 있다. 무교와 유교의 영향이 무려 80%나 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80%나 되는 무교와 유교의 영향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의 본질인 자기부인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자아만족을 위한 기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우리의 종교적 심성을 이해하고 의도적으로 기복신앙을 배제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모래위에 서 있는 것처럼 늘 위태로울 것이다.


2) 고지론 배제


고지론은 또 하나의 위험한 번영신학이다.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해서 높은 고지(권력, 명예, 재물)에 올라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고지에 올라가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그것에 취해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하게 된다.


휴암(1941-1997)이라는 불교 승려는 한국 불교의 새 얼굴이라는 책에서 복에 환장한 불교인들이란 표현을 썼다. 그는 불교가 오늘의 그의 병든 복사상(福思想)을 철폐하다가 설사 신도가 1,300만에서 130만으로 줄어든다 해도 여지없이 그 타락된 물질주의의 앞잡이인 복사상을 철폐하기를 기원하고 싶다 복에 환장이 된 불교인들아! 너희 스승은 너희들이 구하는 왕궁을 버렸는데 너희는 그 스승에게 오늘도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복은 실로 구한다고 오는 것이 아니며, 복은 끝내 복이 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목사가 아닌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써 오늘의 한국 교회에 하고 싶은, 정말 간절하게 하고 싶은 이 말을 33년 전인 1987년에 불교인이 먼저 전불교도들에게 애끓는 심정으로 호소한 것이다.


우리 주님은 어떻게 사셨는가? 우리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슨 복을 받으셨는가? 세상이 복이라고 여기는 것, 장수, 부귀, 명예, 권력 등 그 어떤 것도 추구하거나 소유하신 적이 없다. 그분은 머리 둘 곳도 없이 지내시다가 결국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 생을 마치셨다. 또한 모든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 보좌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은 승리자로서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이 아니라 죽임 당한 어린 양의 모습이다(5:6).


하나님의 복은 세상의 성공으로, 고지를 점령하고 승리의 깃발을 나부끼는 것으로, 포효하는 사자와 같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는 실패하는 모습으로, 때로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모습으로 비쳐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죽이고 십자가의 은혜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승리자의 삶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스스로도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이 죽임당한 어린 양의 모습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한다. 기복신앙과 고지론을 배제하지 않는 이상 우리의 신앙은 사상누각에 불과할 것이다.